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난의 변 (문단 편집) === 학자들의 시대 ===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Jianwen_Emperor2.jpg|width=170]] || || '''[[건문제]]'''(建文帝) || 선대 황제인 홍무제의 성향이, 밑바닥부터 시작해 모든 당대 영웅들을 무너뜨릴 정도로 강력하고 무시무시한 성향이었다고 한다면, 반면에 건문제는 아버지인 의문태자 주표를 닮아 학문을 좋아하고 대단히 효성이 지극할 정도로 선한 성격이었다.[* 아버지인 의문태자가 병에 걸렸을 때, 자신의 몸이 허약해질 정도로 아버지를 돌보느라 조부인 주원장이 걱정한 일도 있었다.] 건국 30년간 끝없이 이어진 전쟁과 신하들에게 대단히 엄격한 홍무제의 치세를 겪은 학자들은, 젊은 건문제에게 상당한 기대를 걸었다. 이러한 학자들은 건문제가 즉위하기 이전부터 그와 보조를 같이 하며, 향후 건문제의 판단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대표적인 인물로 [[제태]](齊泰)와 [[황자징]](黃子澄)이 있었다. '''제태'''는 홍무 17년([[1384년]]) 응천부 향시(鄉試)에서 첫 번째로 천거된 이후에 예부와 병부 2부의 주사(主事), 그리고 좌시랑(左侍郎)을 역임하며 관직 생활을 했던 인물이었다. 상당히 능력이 있었는지, 그 깐깐한 홍무제도 기이한 사람이라고 여겼을 정도였다. 건문제는 황태손 시절부터 제태를 중요한 사람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황자징'''은 홍무 18년([[1385년]]) 회시에서 1등을 했는데, 일찍부터 건문제에게 동성 제후 왕국들을 견제해야 할 필요성을 역설했다. >혜제(惠帝=건문제)가 황태손이었을 때, 일찍이 동각문(東角門)에 앉아 황자징에게 이르길 > >"여러 왕들이 (나의) 존속(尊屬)인 데다 중무장 병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불법을 많이 저지르니, 어찌해야 하는가?" > >라 하니, 대답하길 > >"여러 왕들의 호위병들은 고작 스스로 지키기에만 족할 뿐이며, 만일 변란이 일어나더라도, 6사(六師=중앙군)에 임하신다면 누가 능히 지탱할 수 있겠습니까? 한의 오초칠국은 강하지 않았던 게 아니지만, 끝내는 패망하여 멸망했습니다. 대소(大小)와 강약(強弱)의 세력이 같지 않으니, 순역(順逆)의 이치도 서로 다를 것입니다."라 했다. 황태손이 그 말이 옳다고 여겼다.'''─《명사》(明史) <황자징(黃子澄)전>''' 자연스레 건문제가 황위에 등극하고 나자, 이러한 학자들은 정부의 요직을 차지하며 정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제태는 지금의 장관격인 상서(尙書)로 승격되었고, 황자징은 태상경(太常卿)이 되어 국정을 담당했다. 또한, 원나라 시대의 뛰어난 문학가인 오래(吳萊)의 제자로, 당대 가장 뛰어난 학자였던 송렴(宋濂)의 문하 중에 가장 뛰어난 인물이라는 '''[[방효유]]'''(方孝孺)를 시강학사(侍講學士)로 삼았다. 건문제 시기의 정치를 주도하게 된 학자들은 당시의 정치 현상을 분석하여, 지금 제국의 형세가 과거 전한 초기와 비슷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전한 제6대 [[경제(전한)|경제]] 시절, 각지에 봉해졌던 유씨 황족들이 연합하여 [[오초칠국의 난]]을 주도했는데, 당대 명나라 역시 각지에 주씨 황족, 즉 건문제에게는 숙부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번왕으로 봉해져 각각 군대를 거느리고 있었던 것이다. 여러 번왕(藩王)들의 세력 약화. 이것이 바로 건문제 정부의 기본 방침이었다. 앞서 말한 학자들의 성향 등으로 미루어 보면, 이 정책의 가장 큰 시발점은 건문제 본인이라기보다, 그 주변 학자들로 봐도 될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